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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윈스턴 처칠의 알지못했던 면모 10가지

by twoslicesoftoast 2023. 5. 8.

윈스턴처칠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수상으로 위인전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죠. 그런데 위대한 인물들의 이면을 엿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특정 국가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 다른 국가에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 과연 위대한 인물의 기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스쿨님이 만들어진 영상은 이런 정보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좋은 것 같습니다. 원문 영상은 글 하단에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식스쿨에서 알려주는 윈스턴처칠의 이면

안녕하세요. 지식 스쿨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놀라운 지도력을 보였던 윈스턴 처칠은 1965년 사망 이후 현재 영국에서 위대한 인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어서 업적과 함께 부정적인 논란도 남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집무실에서 처칠의 흉상을 치워버린 것은 이를 잘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처칠과 관련한 또 다른 이면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시작합니다. 

 

애주가

19세기 말 보어 전쟁에 참전하기 전 60병의 술을 가지고 갔을 정도로 처칠은 애주가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는 술과 관련해서도 종종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의 일화였습니다. 1945년 처칠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었던 이븐 사우디 국왕을 이집트로 초청해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왕을 만나기 전 관계자가 처칠에게 왕 앞에 서는 흡연은 물론이거니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알려준 것입니다. 


이에 처칠은 국왕을 만나 자신의 종교는 절대적으로 신성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시가를 피우고 식사 사이 또는 식사 도중에 술을 마시는 것이라며 이를 왕에게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븐 사우드 국왕은 처칠의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수수료

모든 분야에서 현재의 기준과 과거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뇌물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던 1920년대 처칠은 사람들이 주는 모든 선물을 다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받은 대표적인 대가는 1923년 로열드치셸과 버마 앵글로 페르시안 우리 컴퍼니라 불렸던 두 석유회사의 합병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합병 신청 시 그가 두 석유회사를 대표해 달라는 요청에 관한 것으로 이때 쳐 치른 대가로 5천 파운드를 받았습니다. 당시 5천 파운드는 현재 가치로 38만 6천 파운드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돈 6억 3천만 원 정도입니다. 

 

이슬람교

이슬람교와 관련해서도 처칠로 논란이 있습니다. 1899년 처칠의 저서인 니버 워에는 무함마드 주의가 신봉자들에게 가하는 저주가 끔찍하다고 적혔는데 이에 더해 예언자들의 추종자들이 통치하거나 거주하는 곳에는 늘 무분별한 관행 허술한 농업 시스템 시체드는 상거래 불안정한 재산 등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그가 반이슬람주의라는 주장이 많았는데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위해 싸웠던 무슬림들을 위해 모스크 건설을 지원하며 감사를 표한 것과 인도에서 무슬림들과 폴로 경기를 함께 하는 것만 보면 그를 반이슬람주의자로 몰기에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반노조 견해

1910년 웨일스 남부 토니판디에서는 광산 소유주와 광부들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곳에서는 1년 정도 파업이 진행됐습니다. 파업 기간 광부들과 경찰들 간에는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에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처칠은 군인들을 소집했습니다. 다만 그는 군인들이 배치될 경우 유열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해 군인들을 파업 현장으로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사 간의 중재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노동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처칠이 사건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비판 때문에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1년 뒤 리버풀에서 벌어진 운수 파업은 첫 처칠 변화된 시각을 보였습니다. 이때는 군대를 소집해 파업 현장에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급기야 군대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 이후 처칠은 노조를 상당히 격멸하며 반노조 입장에 서게 됐습니다. 

 

아일랜드

전쟁 및 항공부 장관이었던 1919년 당시 처칠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에서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블랙앤 텐이라고 불렸던 경찰들의 배치를 책임졌었는데 이들이 아일랜드에서 폭력을 과도하게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처칠을 반 아일랜드 주의자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이전 처칠은 1912년부터 아일랜드의 분할에 따른 자치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또한 1921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조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갈리폴리 전투

1914년 영국의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스스로를 군사전략가로 인정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는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수십 척의 해군 함정으로 적을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고 봤고 이를 통해 해안의 상륙도 문제없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계획을 두고 내부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럼에도 처칠은 해군을 중심으로 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갈리폴리 상륙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은 해안의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기뢰와 오스만 군대의 저항으로 인해 큰 피해를 봤습니다. 여러 척의 전함이 침몰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해군 단독 작전으로 추진했던 터라 해군의 요새 공격 후 육군의 해안 상륙이 지체돼 육군도 엄청난 피해를 봤습니다. 이로 인해 처칠은 해군 장관에서 해임됐고 갈리폴리 전투의 악몽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간디

처칠은 인도의 독립을 주장했던 간디에 대해 불신이 컸습니다. 이 때문에 생전 그는 간디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대표적인 처칠의 발언을 보면 먼저 간디의 평소 옷차림을 두고 처칠은 간디를 거의 벌거벗은 거렁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또한 식민주의 거부 움직임을 보인 간디에 대해 선동적인 변호사 간디가 고행하는 금욕적인 수도자 행세를 하는 건 역겹다고 말했습니다. 간디의 단식 투쟁을 두고서는 단순한 금식 때문에 간디가 석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아예 굶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발언했습니다. 심지어 벵골 대기근 당시 인도 현지에 영국 관리들이 보낸 식량 전 전보를 두고도 처칠은 왜 간디는 아직도 죽지 않았냐고 되물었을 정도로 간디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가스살포

1919년 전쟁 및 항공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처칠은 반문명적인 부족들을 상대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더구나 이는 대중들이 가스 사용에 부정적인 것을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에 이어 나온 것이라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처칠은 쿠르드족의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긍정적이어서 대중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한 독가스는 살상을 위한 독가스가 아닌 최류가스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스의 영향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메모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비판적 시각은 여전합니다.

인종적 시각

처칠은 인종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종과 관련한 그의 견해 때문입니다. 그는 우생학에 관심을 보였고 인종도 위계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에 처칠은 아프리카인보다 인도인을 높게 생각했고 백인들 중에서도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더 높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는데 어찌 됐던 그는 우생학을 신봉하며 자신의 기준에 따른 열등한 인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많이 내비쳤습니다. 특히 인도 외무장관 면전에서 괴상한 종교를 신봉하는 이상한 종족인 인도인들을 증오한다고 발언하는 건 놀라울 정도입니다. 게다가 처칠은 1912년 제1차 국제우생학대회에서 명예 부회장이었고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균하는 법안의 초안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처칠은 인종에 대해 히틀러만큼 극단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이를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벵골 대기근

1943년 인도에서는 대기근으로 3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벵골 대기근은 영국의 쌀 수탈로 인해 발생했지만 이것에 대응하는 방식은 많은 논란을 낳은 바 있습니다. 처칠도 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대기근이 심각해지자 인도 현지에 영국 관리들은 식량 지원을 긴급히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칠 내각은 인도의 식량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영국 본토에 식량 사정도 형편 없었고 인도로 식량을 운송하는 것에도 추축국의 해군력을 감안했을 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를 두고 불거져 나온 처칠의 발언입니다. 그는 대기근이 원인이 토끼처럼 번식하는 인도인들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대기근을 바라보는 시각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원문 영상 - 지식스쿨

https://www.youtube.com/watch?v=4EZkFJKHV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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